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앞두고, 광주로 향했다. 5.18 기념 전시실은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문이 굳게 닫혀 쓸쓸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오월 정신과 그날의 아픔은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했다. 40년이 흐른 지금, 그날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역사의 현장들을 따라 걸었다.
 
 ▲국립 5.18민주묘지 앞에 걸린 40주년 추모의 글들. ⓒ데일리굿뉴스

광주의 오월을 걷다

“광주여 우리들의 십자가여!” “민주주의를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 민주묘지 앞에 가면 그날을 기념하는 리본들이 촘촘히 걸려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40주년 행사가 코로나19로 인해 취소되거나 연기됐지만, 5월의 광주를 기억하는 추모객의 발길은 이어지고 있었다.

추모 글귀를 작성하고 있던 박 모(55,광주 시민) 씨는 40년 전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다는 그는 “학교 선생님들이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설명해주지 않았다”며 “묘역에 와보니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난다”고 전했다.

‘민주의 문’으로 들어가니 ‘민주광장’에 세워진 40미터 높이의 5·18 민중항쟁 추모탑과 봉분들이 보였다. 40년 전 치열하게 투쟁했던 이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묘지를 따라 걷다 보면 무덤 앞에 놓인 사진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온다. 빛바랜 흑백 사진 속 인물들의 굳게 다문 입과 다부진 눈은 못다 한 말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5.18 민주유공자 묘역. ⓒ데일리굿뉴스

“어머니 조국이 나를 부릅니다. 민주·정의·자유 위해 앞서갑니다.”

묘비 뒤편에는 이곳에 잠든 이들의 가슴 아픈 사연이나 유언, 유가족의 비통한 심정이 새겨져 있다. 1980년 당시 꽃다운 나이에 불의한 국가권력에 무참히 희생된, 그들의 원통함은 누가 풀어줄 수 있을까.

김춘례 씨의 묘비를 가리키며 안내 해설사는 “일을 마치고 고향으로 내려가던 18살 김춘례 씨는 시민군의 버스를 만나 차에 올라탔지만, 무자비한 총탄에 사망했다”며 그날의 애통함을 대신 전했다.

추모객들은 묵념으로 희생자들의 아픔을 기렸다. 실제로 그날의 아픔을 겪은 이들로부터 직접 들은 당시 참상은 더 가혹했다.

“5월 18일이 충장로로 이사를 하던 날이었어요. 두 살짜리 아이를 등에 업고 시내 한복판을 뛰었죠. 그날의 기억을 잊을 수가 없어요” 김혜숙 씨(66, 광주시민)는 눈물부터 글썽였다. 함성 소리, 군중 소리, 택시 클랙슨 소리, 총소리, 탱크 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다고.

1980년 5월 17일 자정.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각 대학교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오직 계엄 당국의 일방적 판단에 의한 강제 휴교 조치였다.

대학생과 시민들은 “계엄군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전남도청 앞 광장으로 모였다. 다급해진 계엄 당국은 훈련된 공수부대를 광주 시내에 투입해 폭력적인 진압을 이어갔다.

김 씨는 “희생자들의 벗겨진 신발이 거리에 산더미처럼 쌓일 정도로 무자비했다”며 “총알이 날아올까봐 집에는 담요와 솜이불로 바리케이트를 쳐놓을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평화적으로 시위하던 시민들은 눈앞에서 죽어나가는 희생자들을 보면서 목숨을 내놓고 계엄군에 맞섰다. 결국 민주주의를 지키려 맞서던 이들은 신군부의 군홧발에 짓밟혀 쓰러져갔고 항쟁은 많은 희생을 남긴 채 종료됐다.

김 씨는 “진정한 사랑과 평화는 진정한 회개가 있어야 한다”며 “발포 명령자가 진정으로 뉘우치고, 사죄하는 날이 왔으면 한다"며 안타까움을 전했다.
 
 ▲5·18민중항쟁 추모탑. ⓒ데일리굿뉴스

40년이 흐른 지금, 남겨진 과제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5월의 기억은 선명하지만, 진상규명은 아직도 제자리걸음이다. 5.18 진실규명신고소 앞에 가면 “진실을 말하지 않고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글이 적혀있다. 코로나로 전시관도 모두 문을 닫았지만 신고소의 불은 환히 켜져 있다.

4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면서 5.18민주화운동의 사상자와 행방불명자에 대한 공식 집계가 이뤄지고 피해자 보상을 위한 법률이 제정되는가 하면 핵심 가해자들이 법적 처벌을 받는 등 겉으로는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5.18 민주화운동을 둘러싼 잡음은 여전한 상황이다.

풀어야 할 최대 과제는 앞선 9차례 조사에서 미완에 그친 발포명령자 규명이다. 발포 명령 체계를 추적하는 과정은 1980년 5월 계엄군 만행의 '주범'을 가려내는 여정이나 마찬가지다.

전두환 신군부는 자위권 발동을 내세우며 발포명령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왔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지난 4월 27일 법정에 출두해서도 "내가 알기로는 헬기 사격은 없었다"며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군 기록이나 관련자 진술 등 핵심 단서가 나오지 않으면서 신군부 측 주장은 지금껏 뒤집히지 않고 있다.

40년 동안 생사조차 확인 못 한 5·18 행방불명자의 소재 파악 또한 풀어야할 과제다. 1980년 5월 사라진 사람을 찾는 가족이 광주시에 신고한 행방불명자는 242명에 달한다.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은 올해를 진상규명 원년의 계기로 삼아야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광주 무진교회 장관철 목사는 “광주 시민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며 “하루빨리 진상규명이 돼서 정쟁이나 갈등이 해결되고, 화합을 넘어 민족의 통일까지도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전했다. 무진교회는 진상규명을 위한 서명운동을 추진하고 모임 장소를 제공해 유가족을 돕는 등 80년 후반부에 비전향 장기수들을 돕기 위한 운동을 펼쳤다.

광주의 거리에 섰다. 5월의 따뜻한 햇볕 아래서 나무는 보송보송한 새잎을 피우기 시작했지만, 한여름보다 뜨거웠던 5월을 앞둔 거리는 한산했다. 낮 최고 기온 25도를 기록했던 1980년의 그 날, 300∼400명의 학생이 계엄군에 쫓기며 외쳤던 구호가 텅 빈 거리에서 들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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