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하고 어진 사람들이 모인 '회현사랑채'
공동육아공간으로 이용하며 '이웃사촌' 실감해
코로나로 공동육아 중단됐지만 나눔은 계속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생활 속 거리두기'로 전환된 지 열흘 남짓. 완화된 거리두기로 생활 방역에 들어갔지만, 일상의 회복은 더디기만 하다. 무엇보다 전염병에 대한 공포심은 타인과의 접촉을 피하고 고립시키는 행위를 자연스럽고 익숙게 했다. 이 같은 현실은 씁쓸함을 자아내지만, 마냥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을 방증하듯 최근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공동체에서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한 것. 공동체성 회복과 활성화의 공적 움직임이 나타나는 것도 그 일환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향한 다각적 모색이 논의되는 가운데, 마을 공동체가 주목받고 있다.

 
 ▲회현동 주민들의 사랑방, 회현사랑채 ⓒ데일리굿뉴스
사람을 잇는 공간, '회현사랑채'
 

서울 중구 남산 자락이 품은 마을, 회현동(남촌·南村). 현명하고 어진 선비들이 모여 살았다던 이곳은 일제강점기 일본인을 거쳐 해방과 한국전쟁 후 서민들의 터전으로 자리 잡았다.
 
회현동은 유구한 세월을 관통한다. 가파른데다 좁고 굽이진 골목길 사이로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오래된 가옥들이 눈길을 끈다. 흡사 미로 같은 골목길을 한참 걸어 막다른 곳에 다다르자 근·현대의 조화가 이색적인 2층 목조가옥이 나온다. 회현동 주민들의 마을회관 '회현사랑채'다
 
회현사랑채는 서울시가 2016년부터 진행한 '서울역 일대 도시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마련됐다. 회현동 주민들에게 부족했던 문화생활과 커뮤니티 공간을 제공해 삶의 질을 높이는 동시에 지역공동체 성장을 목표로 지난해 11월 개관했다.
 
논의 단계부터 공간 매입, 이름 짓기까지 회현사랑채 모든 것이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졌다. 도시재생사업에 참여했던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서울역 일대 지역 주민이 꾸린 사회적협동조합이 직접 운영에도 나서 자생력을 확보키로 했다.
 
주민들이 가장 염두에 둔 것은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회현동은 오랫동안 개발에 소외된 '낙후 지역'이었다. 청년들은 하나둘 떠났고 노인들만이 남았다. 생기를 잃은 마을은 오랜 시간 과거에 멈춰있었다. 아이들을 위한 제대로 된 공간이 있을 리 만무했다.
 
회현사랑채가 개관하면서 적막했던 마을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몇몇 주민은 아이들의 소리를 쫓아 회현사랑채를 방문하기도 했다. "동네에 아이들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사람 사는 동네 같다"며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회현사랑채가 개관하면서 마을에는 여러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회현동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사진은 아이들이 회현사랑채에서 진행하는 미술 교실 등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모습 (사진제공=회현사랑채)

회현사랑채가 운영하는 공동육아시설은 주민들의 일상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아이들에게는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넓고 안전한 공간이 생겼다. 또래와 함께 어울리며 사회성도 배워갔다.
 
회현사랑채는 단순히 장소라는 역할에만 그치지 않았다. 주민들은 짧은 시간이지만 직접 운영하면서 콘텐츠가 없으면 금세 죽은 공간이 되어 버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술이나 과학 교실, 갤러리 투어, 체험학습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함께 고민해나갔다. 성교육이나 책 읽기 교육 등 부모를 위한 교육도 동시에 진행했다. 시작 단계 치고는 반응이 좋았다.
 
살아있는 공간이 주는 힘은 컸다. 커뮤니티가 확장됐고, 함께 나누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물론 갈등도 생기기 마련이지만 서로 대화하고 이해하며 갈등을 해결하려는 노력과 지혜를 터득하고 있다. '이웃사촌'이 되는 과정이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노인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시도 중이다. 인근 복지관과 연계해 숲 체험 등 환경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했다. 특히 회현동에 3대 이상이 사는 가구가 많다는 점을 고려해 손자·손녀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구상했다.
 
이러한 노력은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주민들로 하여금 마을에 애착을 갖게 한 것. 회현사랑채 공간매니저인 노문이 씨는 "자가 집이 아니라 떠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을에 대한 애착이 없었다"며 "그런데 공동체가 생기면서 이곳에 더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회현동의 핫플레이스가 된 마을카페 '계단집' ⓒ데일리굿뉴스

주민이 직접 내리는 특별한 커피 한잔
 
회현사랑채의 굽이진 언덕길을 내려오면 돌계단이 길게 이어진 가옥이 눈길을 끈다. 적산가옥에서 커뮤니티 카페로 재탄생한 '계단집'이다. 회현사랑채가 주민들을 위한 사랑방이라면, 계단집은 주민들의 고용과 수익을 창출하며 지역 경제 상생을 도모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계단집은 현재 주민 바리스타 3명이 힘을 모아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개관과 동시에 주민뿐 아니라 외부인의 방문이 이어지며 일대 명소로 자리매김했다.
 
발길이 끊이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 마을 카페지만 특별하다. 주민 바리스타들은 소량으로 만들더라도 신선한 재료로 제공한다는 원칙을 고수한다. 회현동에서 유일하게 맛볼 수 있는 스페셜티 커피와 수제 양갱 등은 계단집의 시그니처다.
 
주민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동시에 외부인의 유입과 수익 창출 등을 통해 지역경제의 상생발전을 이끄는 계단집의 선순환은 주민과 외부인 모두를 아우르는 이상적인 모델로 제시되고 있다.
 
 ▲회현동 주민들은 회현사랑채라는 공간을 통해 공동체의 끈을 이어가고 있다.(사진제공=회현사랑채)

코로나 위기 속에서 빛난 공동체
 

코로나19 여파는 회현동에도 밀려들었다. 회현사랑채는 주로 공동육아로 이용되고 있는 모임방, 강의실의 모든 운영이 3개월째 중단된 상태다. 
 
하지만 회현동 주민들은 회현사랑채와 계단집이라는 구심점을 통해 끈끈한 유대감과 굳건한 결속력을 보여주고 있다. 코로나19라는 위기 속에서 회현동 공동체는 오히려 빛을 발하고 있었다.
 
청년크리에이터 김유진 씨는 "주민들에게 대면이나 비대면은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며 "여전히 이 공간을 통해 나눔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 씨는 "주민들의 만남은 최소화됐지만, 예를 들면 먹을거리 등이나 다양한 정보를 사랑채를 통해 공유하며 공동체의 끈을 이어가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사회에선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공동체 활성화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준비로 공동체 활성화에서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코로나19 사태를 통해서 사회는 '새로운 변화'라는 문제를 떠안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문제는 공동체가 연대하지 않으면 해결책이 없다고 덧붙였다.
 
신 교수는 "과거처럼 얼굴 맞대는 그런 차원의 연대 의식이 아니라 조금 더 일반화되고 조금 더 넓은 의미에서 보편적인 연대라는 것이 필요하다"며 "그것이 코로나 사태의 핵심적인 요인이라는 인식을 강화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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