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봉 목사 ⓒ데일리굿뉴스
나는 지난번에 비전과 관련하여 네 종류의 사람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비전과 관련한 네 종류의 사람을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전은 그 단어(vision)가 의미하는 바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보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씨 뿌리는 비유 또한 그 핵심은 결국 ‘보는 것’이다(마 13:10-17).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에서 씨앗은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가리킨다(19절).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과 함께 하나님의 통치인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한 것을 선포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신 표적과 기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한 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고 계셨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그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라고 강력하게 촉구하셨다. 따라서 여기의 씨앗은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예수님을 통해 행하고 계셨던 하나님 나라와 관련한 모든 일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씨앗’이 예수님을 통해서 사방으로 뿌려지고 있었다.

이 비유에서 네 종류의 밭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메시지를 듣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그 놀라운 표적과 기사를 본 사람들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예수님을 통해 행하고 계셨던 그 놀라운 하나님의 나라의 일들을 듣고 본 네 종류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 당시 그 ‘씨앗’이 사방으로 뿌려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각기 달랐고, 그 결과 또한 하늘과 땅처럼 달랐다.

비전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비유에서 길 가에 해당하는 자들이 바로 방랑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역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전혀 보지 못했다. 당연히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을 통한 그 놀라운 기적들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과 성령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전혀 듣지 못했고,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전혀 보지 못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비전을 전혀 보지 못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여기서 길 가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누구보다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13-15절 참조). 길 가는 굳은 마음을 상징한다. 즉, 그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지식과 지혜와 경험과 전통을 고집하면서,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이리저리 판단하는, 배우고자 하는 자세가 전혀 없는 교만한 마음, 강퍅한 마음을 상징한다.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정확하게 그런 사람들이었고, 그 결과 그들에게는 영적 분별력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그 놀라운 역사들을 행하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전혀 ‘보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러 곳에서 그들을 소경이라고 부르셨다.

그 많은 성경적인 지식과 그 뛰어난 종교적인 헌신과 의식(儀式)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방랑자였다는 사실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의 비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보이시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비전을 위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장 핵심이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에 관한 성경적인 지식에는 뛰어났을지 모르지만 그리고 그들의 성경적인 지식이 정통적이었을지 모르지만(마 23:1-3 참조), 그들은 하나님과의 어떠한 인격적인 교제나 관계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요 5:37), 당연히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전혀 알지 못했다(마 16:3). 그 결과 그들은 나름대로 누구보다 성경을 잘 알고, 소위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부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았다. 심지어 그들은 앞장서서 하나님을 대적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대적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개인 뿐 아니라, 교회도 방랑자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모든 교회는 복음 전파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소명을 받았지만, 각 교회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은, 마치 큰 그림의 각 퍼즐 조각처럼 그리고 초대교회 당시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 각기 달랐듯이, 다를 수 있다. 조지 바나는 같은 지역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 할지라도 각 교회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은 각기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만약 같은 지역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이 동일하다면, 그것은 서로 경쟁시키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교회가 그 교회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을 보지 못하면 하나님이 의도하시고 기뻐하시는 대로 세워질 수 없다. 그저 벽돌만 많이 쌓아 놓는다고 집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벽돌들이 설계도를 따라 각기 제자리에 놓여야 방과 부엌과 거실이 되고, 더 나아가 집이 된다. 그리고 건물이 그렇게 세워질 때, 어떤 건물은 가정집이 되고, 어떤 건물은 상가가 되고, 어떤 건물은 학교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만 많이 모인다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그 교회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을 보고, 그 일에 성도들과 교회의 사역이 맞추어질 때,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교회가 세워지고, 그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될 것이다. 또한 거기에 놀라운 하나님의 뒷받침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태평양에서 부지런히 그리고 사력을 다해 노를 저어 가는데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심각한 일인가. 그런 사람이 바로 방랑자다. 그런데 조지 바나의 인터뷰 결과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개인이건 교회건 혹은 기독교 단체건, 방랑자가 매우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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