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6·25 전쟁 69주년, 전쟁의 폐허를 딛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다. 전쟁 당시 한반도 남단에는 피난민이 몰렸고 길거리에 전쟁고아들이 넘쳐났다. 유달산 아래 자리한 '목포 공생원'은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품었다. 그곳엔 국경을 넘어 사랑과 헌신으로 함께한 부부가 있었다.
 
 ▲ 윤학자 여사(왼쪽)와 윤치호 전도사의 사진.ⓒ데일리굿뉴스

목포 양동교회 윤치호 전도사는 부모 잃은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목포의 한 냇가 다리 밑 추위에 떨고 있던 7명의 어린 고아를 발견한 윤 전도사는 그 아이들과 함께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기에 전도사보다 목포의 거지대장으로 더 많이 불렸다. '공생(共生)의 시작이고 기독교 정신으로 함께 더불어 사는 '공생원'의 출발점이다.
 
수 차례 자리를 옮기던 공생원은 1937년 유달산 자락에 터를 닦고 자리잡았다. 당시 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던 정명여학교의 음악교사 '다우치 치즈코'는 자원봉사를 위해 공생원을 찾았다. 두 사람은 아이들을 향한 서로의 열정에 반했고 1938년 결혼했다. 결혼과 동시에 남편의 성을 따르는 일본인처럼 다우치 치즈코는 '윤학자'로 개명했다.
 
공생원은 6·25 전쟁 당시 폐허가 된 적이 있다. 윤치호 전도사는 인민군에게는 친일파, 한국군에겐 빨갱이로 몰리며 오랜 기간 고초를 겪었다. 아이들 식량을 구하기 위해 광주로 떠난 윤 전도사는 그대로 행방불명 됐다.
 
전쟁으로 인해 고아들은 500~600명으로 늘었지만 홀로 남은 윤학자 여사가 감당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버거웠다. 하지만 윤여사는 매일매일 기도와 말씀의 끈을 놓지 않고 아이들을 보살폈다. 시편 23편 말씀은 지친 그녀를 일으켜 주었고 홀로 공생원을 운영하는데 있어 큰 지침이 되었다.
 
3대가 독실한 기독교인이고 음악교사였던 윤 여사는 아이들이 바른 믿음을 가진 신앙인이 되도록 교육에 힘썼다. 또 지식을 통해 훗날 아이들이 자립할 기틀을 마련하고자 했다.
 
 ▲ 20일 목포 공생원에서 만난 정애라 원장이 공생원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데일리굿뉴스

두 사람의 외손녀인 목포 공생원 정애라 원장은 '사랑이 있는 한 인간의 내일은 걱정이 없다'는 두 분의 뜻을 지키며 19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 원장은 "불신 가정에서 빈곤이나 학대로 분리돼 오는 아이들이 많다"며 "이곳에서 하나님을 만나 치유 받고 말씀 안에서 잘 자라나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요셉과 다니엘처럼 세계 선교를 담당하고 귀한 일꾼으로 자라남에 있어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실패하는 일이 없도록 사랑으로 보살필 것"이라고 전했다.
 
현재까지 4,000여 명이 공생원을 거쳐 세상에 나갔으며 지금도 49명의 아이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
 
 ▲목포 공생원 내 세워진 윤치호 선생과 윤학자 여사의 기념비. ⓒ데일리굿뉴스
 
전쟁 속 고아들의 피난처였던 공생원은 올해 91주년을 맞아 UN에 '세계 고아의 날' 제정 청원운동을 준비 중이다. 고아 없는 세상을 꿈꾸던 거지대장 윤치호 전도사, 그리고 한국 고아의 어머니 윤학자 여사의 유지를 잇기 위해서다.
 
전쟁고아를 품었던 두 사람의 헌신과 사랑이 다시금 조명받고 있다.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전쟁 속에서도 오로지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헌신한 두 사람의 삶이 한국교회에 깊은 올림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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