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3.1운동을 전세계에 알린 외신 기자가 있다. 바로 '푸룬 눈의 조력자'라고도 불렸던 앨버트 테일러가 그 주인공이다. 자칫 역사 속에 묻힐 뻔한 앨버트의 사연은 지난 2006년, 서울 행촌동에서 그의 가옥이 발견되며 다시 알려졌다. '딜쿠샤'라고 불리는 앨버트 테일러의 가옥을 직접 찾아가봤다.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앨버트 테일러의 사진과 그의 성경 ⓒ데일리굿뉴스

독립선언서 밀반입해 일제 잔악상 알린 인물
 
AP통신 서울 특파원이었던 앨버트 테일러는 1919년 한반도 전역에서 일어난 31운동과 같은 해 4월 발생한 제암리 학살사건을 전세계에 알린 인물이다.
 
테일러 부부는 그 해 2월, 세브란스 병원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아기 요람 밑에서 뜻 밖의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바로 간호사들이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숨겨놓은 독립선언문이었다.
 
앨버트는 독립선언문을 동생인 빌 테일러의 구두 뒷굽에 숨겨 일본에 밀반입했다. 앨버트는 일본 도쿄 AP통신을 통해 한국의 3.1운동을 미국 등 전세계에 알렸다.
 
또 스코필드 박사와 언더우드 선교사를 도와 일제의 잔악상을 알렸던 앨버트의 기사는 당대 언론 전반의 동향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942년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일제에 의해 추방된 앨버트는 1948년 심장마비로 숨졌다. 자신의 유해를 한국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그는 양화진 서울외국인묘원에 안장됐다.
 
 ▲복원 공사 전 불법 훼손된 딜쿠샤의 모습 ⓒ데일리굿뉴스

 
66년간 흉물로 남았던 딜쿠샤, 복원 공사 시작
 
앨버트의 특별한 사연은 지난 2006년, 그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어릴 적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가옥을 찾으면서 알려졌다.
 
서울 행촌동 언덕에 있던 서양식 주택이 바로 테일러 부부와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함께 살았던 곳이었다. 당시 주인 없이 방치됐던 이 집을 놓고 설왕설래가 오갔다.
 
음산한 분위기 때문에 '귀신 나오는 집'이라고 불리기도 했고, 대한매일신보사옥이나 베델하우스로 추측되기도 했다. 아무도 이 집의 역사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러던 중 2005년 브루스 테일러가 집을 찾기 위해 서일대학교 김익상 교수에게 의뢰를 했고, 집을 찾는 데만 약 2개월이 걸렸다.
 
2006년, 브루스 테일러는 집을 떠나온 지 66년 만에 자신이 태어난 집을 찾게 됐다.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의 '딜쿠샤'라고 불렸던 붉은 벽돌집. 표지석에는 시편 127편 1절이 함께 새겨져 있다.
 
지하 1층, 지상 2층에 유럽풍 창문이 눈에 띄는 딜쿠샤는 테일러 부부가 추방된 뒤 흉물로 남았다. 주인 없는 이 집엔 한국전쟁 이후 피란민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고, 1960년 국유화가 된 이후에도 10여 가구가 무단 점유하며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돼왔다.
 
하지만 앨버트 테일러의 사연이 알려진 이후 정부는 2017년 딜쿠샤를 등록문화재 687호로 지정했다. 또 서울시는 딜쿠샤가 3.1운동을 대표하는 유적이라고 판단해 지난해 복원 공사도 시작했다.
 
서울시 역사문화재과 안미경 학예연구원은 "딜쿠샤 복원 공사는 2020년 7월에 완료될 예정이며, 복원 공사가 완료된 후 2020년 하반기에는 딜쿠샤를 전시관으로 조성해 개관할 예정"이라며 "우선 딜쿠샤의 내부 거실 1,2층은 남아있는 사진을 근거로 고증을 거쳐 테일러 부부가 살던 거주 당시의 모습을 재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현재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테일러 가문의 자료와 유품을 선보이는 <딜쿠샤와 호박 목걸이>전시도 진행 중이다. 탤버트의 손녀가 기증한 유품과 함께 앨버트가 취재한 3.1운동, 제암리 학살 사건에 대한 당시 신문 기사도 만나볼 수 있다.
 
일제의 만행을 알리고, 관련자 처벌과 재발방지를 약속 받으며 조선의 독립운동을 도왔던 앨버트 테일러. 한 세기가 흐른 지금도 그의 증언과 열정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딜쿠샤를 알리는 표지석. 시편 127편 1절이 함께 새겨져 있다.ⓒ데일리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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