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서울 곳곳에서 펄럭이던 수많은 태극기들이 언제 있었냐는 듯 자취를 감췄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당일에는 대대적인 행사들이 열렸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한풀 꺾인 모양새다. 이에 본지는 3·1운동 기념이 일회성 행사에 그치지 않고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을 재조명하자는 취지에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가 진행하는 정기답사 일정에 함께했다. 아직 쌀쌀한 봄 날씨에 옷깃을 여민 채, 주말 이른 아침 충남 천안·아산 일대 3·1운동 유적지로 향했다.
 
 ▲아우내 기미독립만세운동기념비에는 유관순 열사와 함께 김구응 의사의 이름도 함께 적혀 있었다.ⓒ데일리굿뉴스

호서지방 최대 규모,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

겨우내 얼어있던 땅이 녹고 만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驚蟄)이 지났지만 충청남도 천안 아우내 삼거리에는 아직 쌀쌀한 찬기운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마침 오일장이 열린 아우네 장터 거리에는 색색깔 천막들이 줄지어 펼쳐져 있어 활기를 띠었다.
 
좌판에 자리잡은 온갖 싱싱한 봄나물과 지역 토산물, 닭 등 가축들과 더불어 장사꾼들의 힘찬 호객 소리와 흥정하는 사람들, 한 켠에 탁자를 놓고 장기를 두는 모습은 봄이 성큼 다가왔음을 느끼게 했다.
 
100년 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조선 독립 만세’ 함성이 이곳 천안에 내려온 건 한 달 만인 4월 1일이었다. 이날 인근 각지에서 3천여 명이 운집해 당시 호서지방에서 최대 규모의 만세운동이 열렸다. 오후 1시경 동네 어른이었던 조인원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군중들은 헌병주재소로 행진을 시작했다.
 
장터 입구의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기념공원은 당시 헌병주재소가 있던 곳에 조성됐다. 이 곳은 유관순 열사가 붙잡혀 옥고를 치른 장소이기도 하다. 공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횃불과 태극기를 들고 목청껏 만세를 부르는 유관순과 군중을 형상화한 동상을 만나게 된다.
 
맨 선두에 앞장선 유관순 열사는 가히 ‘한국의 잔다르크’라 불릴 만큼 만세운동을 주도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힘차게 양 손을 뻗은 동상들 사이로 바닥에 누워있는 한 남자와 그를 얼싸안고 있는 동상이 눈에 들어왔다. 만일 안내자가 없었다면 유관순 동상에만 잠깐 눈길을 두고 무심히 지나쳐갈 만큼 구석 한 켠에 있었다. 
 
 ▲김구응 의사(32)와 최정철 지사(67)는 1919년 4월 1일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한날 한시에 순국의 길을 걸었다.ⓒ데일리굿뉴스

김구응·박종만 등, 100년 간 조명받지 못한 숨은 주역들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의 숨은 주모자로 뒤늦게 알려진 김구응 의사와 그의 어머니 최정철 지사에요. 그간 우리는 3·1운동의 주도자를 유관순으로 알고 있었지만, 당시 약 200만 명의 수많은 민초들이 참여한 만세운동에서 유독 유관순 열사가 구국의 영웅으로 부각된 까닭은 일부 인사들이 자신들의 친일 행적을 감추기 위한 방패막이었다는 설이 있죠.”
 
유관순의 공적을 추앙하며 그 그늘에 숨은 친일파 가운데에는 유관순의 이화학당 재학 시절 지도교사였던 박인덕이 자리해있다. 그녀는 한 때 독립운동에 헌신하며 유관순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던 인물이다. 하지만 일제 말기 변절한 이후 조선임전보국단이라는 친일 단체에 참여해 각종 친일 강연과 연설에 나섰고 제자들에게 정신대로 향하도록 선동했다.
 
이날 안내를 맡은 감리교신학대학교 외래교수 홍승표 목사는 “해방 이후 박인덕은 1947년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를 구성해 그의 행적을 널리 알리기 시작한다”며 “아이러니한 사실은 유관순을 영웅으로 부각시킨 이들 대부분이 친일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했다.
 
1919년 9월 2일자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된 신한민보는 ‘천안 시위운동의 후문, 30여 명을 일시에 총살’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만세운동의 주모자를 유관순이 아닌 김구응, 박종만으로 밝히고 있다. 또 이듬해 나온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김병조의 <한국독립운동사략>과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도 천안 아우내 장터의 만세운동 주도자를 김구응 의사로 기록하고 있다.

홍 목사는 "만세 현장에서 바로 순국한 김구응 의사는 일제에 잡혀가서 신문이나 재판을 받은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 행적이 기록으로 남겨질 기회 또한 없었다"며 "유관순 열사의 업적을 폄하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유관순과 같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목숨을 잃었지만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는 취지"라고 강조했다.
 
 ▲천안 지역 최초의 교회로 알려진 매봉교회는 유관순 열사의 생가 옆에 위치해 있다.ⓒ데일리굿뉴스

카리스마적 리더 아닌 3·1운동 수많은 참가자들, 전부 빛나는 주연

유관순 열사가 예배를 드렸던 매봉교회(박윤억 목사)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인기 방문지로 떠올랐다. 박윤억 목사는 지난 3·1절 당일 하루 동안 교회를 방문한 사람이 거의 1년치 방문객에 달할 정도였다고 귀띔했다.

천안 지역 최초의 교회로 알려진 매봉교회는 1901년도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연도를 알기 어려운 까닭은 매봉교회 교인들이 이 지역 독립운동의 주축으로 나서자 일제가 1907년 무렵 교회를 모두 불살라 버려 관련 기록들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박 목사는 "유관순의 작은 아버지가 매봉교회의 전도사였고, 여전히 그 친척들이 대대로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며 "친척들에 의해 구전으로 전해지는 내용을 보면 유관순은 교회 뒷편에 위치한 매봉산에 올라가 3일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고 기도를 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당시 집에 없는 유관순을 찾으러 산에 올라갔던 친척은 '(유관순이) 자기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기도하더라'고 전했다고 한다. 

유관순의 성장 환경과 관련 일화들을 설명한 박윤억 목사는 그러면서도 "이제 사람들이 유관순을 그만 기렸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지난 100년 동안 3·1 만세운동의 빛나는 주역으로 전 국민에게 기억된 유관순이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다른 열사들이 조명을 받지 못하고, 후손들인 우리 역시 유관순을 기억하는 것으로 3·1운동에 대한 평가를 끝내버리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가 모든 사람을 다 기억할 수는 없다. 또 17세 어린 소녀가 품었던 독립에 대한 열망과 그 희생은 그 자체로 충분히 기억하고 기려야 한다.

하지만 3·1운동이 단 한 명의 영웅에 의한 것이 아닌, 학생부터 노인까지 그 수많은 민초들이 자발적으로 또 주체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에 의의가 있음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드라마틱한 영웅적 서사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독립운동의 그 면면은 우리의 가슴을 더 오랫동안 뛰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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