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대생 A(20)씨는 지난해 8월 20번째 생일을 맞아 친구들과 소위 '핫'하다는 유명 클럽을 찾았다. 클럽 열기에 취해 기분은 한껏 고조됐다. 자연스럽게 부킹(클럽에서 여성 고객을 남성에게 소개해주는 것)도 이뤄졌다. A씨는 웨이터의 손에 이끌려 VIP 룸으로 들어갔다. 자신을 유학생이라고 소개한 한 남성으로부터 보드카 두 잔을 받았다. 평소 주량이 소주 3병일 정도로 약하지 않아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그런데 술을 마신 이후 A씨는 기억이 끊겼고, 눈을 떴을 땐 모텔에 홀로 누워 있었다. 평소 취하거나 이른바 필름이 끊긴 적이 없었던 A씨는 혹시 남성이 술에 약을 탄 것이 아닌지 두렵고 불안했다. 결국 A씨는 남성을 경찰에 고소한 후 약물 검사를 받았다. 하지만 A씨는 음성 판정을 받았고, 남성은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서울 강남 유명 클럽 '버닝썬' 사건으로 최근 약물 성범죄 논란이 뜨겁다. 지난 2일 오후 서울 혜화역 일대에서 열린 여성에 대한 약물범죄 규탄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GHB(물뽕) OUT' 등이 적힌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연합뉴스
   
약물 성범죄, 누구나 피해자 될 수 있어
 
서울 강남 유명 클럽 '버닝썬' 사건으로 최근 약물 성범죄 논란이 뜨겁다. 클럽 안에서 마약류를 유통하거나 투약한 혐의가 불거지면서, 중추신경억제제인 GHB(Gamma Hydroxy Butyrate·감마 히드록시 부티르산), 속칭 '물뽕(물 같은 히로뽕)'이 덩달아 세간의 관심사가 됐다.
 
신종마약인 물뽕은 성적 흥분 작용 때문에 일부 남성들이 성범죄의 도구로 악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성범죄 약물' 혹은 ‘데이트 강간 마약’ 등으로 불리며 수면유도제 졸피뎀과 함께 대표적인 성범죄 약물로 공공연하게 거래되고 있다.
 
신종마약의 경우 마약인지 아닌지 구별하기가 어려워 우려가 크다. 버닝썬 사건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물뽕도 무색·무취·무미라는 특성 때문에 술에 타서 마시면 감지해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마실 경우 10~15분 이내 몸이 이완되고 기억을 잃게 된다. 무엇보다 24시간이 지나면 약물이 체내 밖으로 빠져나가 사실상 약물 검출이 어려워 A씨와 같은 피해자가 속출하고 있다.
 
최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버닝썬 사건 이후 별도로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서울과학수사연구소에 의뢰된 성범죄 관련 약물 감정 건수는 △2015년 462건 △2016년 630건 △2017년 800건 △2018년 861건으로 최근 4년간 2배가량 급증했다.
 
그러나 국과수 본원과 서울연구소에 감정 의뢰된 성범죄 사건 중 물뽕이 검출된 건수는 △2015년 3건 △2016년 3건 △2017년 4건 △2018년 5건 등 최근 4년간 총 15건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마저도 피해자의 소변이나 혈액 등이 아닌 모두 성범죄 혐의자의 압수품에서 검출돼, 피해 사실 입증이 어렵다는 것을 다시 한번 방증했다.
 
또 다른 문제는 수사기관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경찰청은 현재 약물 성범죄와 관련한 정확한 실태를 파악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청 마약계 관계자는 "현재로선 약물 관련 성범죄에 대한 확인이 어렵다"면서 "내부적인 조사 자료는 있지만 공개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약물 성범죄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여성들을 중심으로 다시 커지고 있다. 지난 3월 2일 서울 종로구 혜화역 1번 출구에는 여성 800여 명이 모여 '남성 약물 카르텔 규탄 시위'를 열었다. 무색·무취·무미인 물뽕을 형상화하기 위해 무채색 옷을 맞춰 입은 여성들은 'GHB(물뽕) OUT' 등이 적힌 피켓을 들고 약물 성범죄를 규탄하며 정부에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시위 주최 측은 "불법 강간 약물을 유통한 판매자와 구매자, 이를 이용해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에 대해 피해자가 납득할 수 있는 강력한 처벌을 요구한다"면서 남성 약물 카르텔의 해체를 주장했다.
 
이 가운데 경찰은 "마약류 밀반입·유통단계 등 '1차 범죄'부터 유통된 마약류를 이용한 성범죄 등 '2차 범죄', 2차 범죄로 확보한 불법촬영물 유포 등 '3차 범죄'까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만큼 종합적으로 대책을 수립해 대응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사회 전반에 불거진 물뽕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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