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영 칼럼]3·1 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정재영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종교사회학) ㅣ 등록일 2019-03-06 16: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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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교회
 

 ▲정재영 교수
올해는 3·1 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로 이와 관련된 다양한 행사가 벌어지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3·1 운동이 기독교를 중심으로 일어나서 교계에서도 이를 기념하기에 여념이 없다.
 
1919년의 3·1 운동은 33명의 민족 대표들의 철저한 비폭력 평화 시위였는데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 중 기독교인이 16명이었을 정도로 기독교인이 절대 우세했다. 이 기독교인은 모두 개신교인으로서 정교분리를 주장하며 3·1 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천주교와 비교된다.
 
또한 3·1 운동을 통해 희생된 사람 중 다수가 기독교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3·1운동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기독교인들의 애국심은 식지 않았다. 해외로 나가서 임시정부를 세우고, 독립군이 되거나 혹은 국내에서 의열단 운동에 가입하였던 인사들 가운데 기독교인이 많았다.
 
이와 같이 3·1 운동은 기독 신앙에 바탕한 애국심으로 무장한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일어났는데 당시에 개신교 인구가 약 2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1%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일제 탄압 속에서 교회가 피난처이자 시민들의 공간이 됐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선교 초기에는, 개종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기독교인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공부하며 설교를 들었던 동네 가옥의 사랑방이 교회의 역할을 감당했다.
 
초기에 여자 선교사들은 안방에서, 남자 선교사는 사랑방에 들러 각각의 공간에서 대화의 문을 열기 시작했으나 이후에 안방이라는 사사로운 공간에 갇혀 공공의 자리로부터 고립되어 있던 여성들도 교회의 공공 공간으로 들어오게 됐다. 이것이 잘 알려진 ‘ㄱ’자 형태의 교회 건물이다.
 
당시 교회에서는 남녀와 신분의 차별이 없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토론회가 활성화됐으며 자발결사체로서의 교회가 전국 곳곳에 세워지면서 공공의 공간으로서 수평의 의사소통을 수행하는 시민들의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그리하여 교회에 속한 교인은 공공의 공간에 참여하는 자를 뜻했으며, 초월의 가치에 자신을 이어 기존하는 관행을 허물어뜨릴 수 있는 새로운 삶에 헌신하겠다며 공중 앞에서 선서하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당시의 기독교인이었다. 3·1 운동이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것은 이러한 바탕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에 전국을 망라하는 시민 조직은 교회 밖에 없었고 교회가 전국적인 의사소통의 망이 되었던 것이다.
 
3·1 운동 이후의 한국 교회
 
그러나 3·1 운동 이후에 한국교회는 빠르게 변해간다.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평양대부흥기를 거치면서 부흥하기 시작한 한국교회는 3·1 운동 이후에 제도화의 길을 걷게 된다. 3·1 운동 이후 조선의 독립운동은 이념적, 조직적으로 나뉘기 시작한다.
 
이념적으로는 오른편에 문화적 민족주의 그룹이 있었고, 왼편에는 공산주의 세력이 있었다. 전략적으로는 외교 노선이 있는가 하면 무장 투쟁 노선도 있었다. 그런데 3·1 운동 이전까지 개혁 정치와 독립운동 전선의 맨 앞에 서 있던 기독교는 ‘순수 종교화’ 작업에 열중하고 교회의 ‘비정치화’에 더욱 몰두하면서 민족의 문제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교회는 이 세상 문제를 논의하는 곳이 아니라 ‘저 세상’을 바라보는 곳이 되어갔다.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던 목사들도 교회와 사회, 정치 문제를 분리하고자 했다.
 
교회와 독립운동이 분리되기 시작한 이유는, 일제가 ‘문화 정치’라는 이름으로 집회, 결사, 언론의 자유를 제한적이나마 허용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은 더 이상 종교의 보호벽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고, 교회 공동체에 기댈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교회 지도자들이 사회 문제로부터 관심을 돌리기 시작하면서 민족주의 좌파뿐만 아니라 우파도 교회에 등을 돌리고 교회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비사회화, 비정치화 경향은 한국 교회의 제도화와 관련돼 있다. 1920년대에 이르면 한국교회는 조직상으로 전에 없이 엄청난 수의 봉급자들을 가지게 된다. 장로교와 감리교만 해도 1,000명이 넘는 성직자와 2,000명 가까운 행정 요원들이 교회에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이들은 25만 명이 넘는 신도들과 수천의 교회와 수백의 학교를 운영하고 가르치는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이 종교 지도자로서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얻게 되자, 옛 양반들처럼 이들도 교인과 일반 사람들에 대해 지적, 문화적, 사회적 우월감을 갖고 이들 위에 군림하려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자 기독교 안에서조차 지도자들이 점점 상층 계급에만 관심을 가지고 그들과 짝하여 간다는 비판이 나올 정도였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연구이다. 이는 교회 성장이 몰고 온 ‘평범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의 사회 발전 운동이 낳은 열매를 얻고 기독교 지도자들은 사회적 상승 이동을 하게 됐다. 기독교가 베푼 교육과 새정치 훈련을 받고 그 안팎에서 자리를 얻어 권위적이고 위계적인 지도자 그룹을 형성했고, 점차 보통 사람이 돼 간 것이다.
 
결국 사회 혁신 그룹이었던 기독교 공동체가 기득권층화 되면서 그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도 약화되고 보수화의 길을 걷게 됐다.
 
3·1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더욱 굳건한 제도 위에 서 있다. 전래 초기 한국교회는 교육과 의료 활동을 주도하며 구습 개혁, 신분제 타파, 여권 신장과 여성교육, 술·담배·아편 금지, 혼례·장례 개혁 등을 통해 근대 의식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존엄성, 인간의 권리와 자유, 평등과 정의와 같은 근대적 가치를 제공했다. 당시에 한국교회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수가 적고 교인 수도 적었지만, 남녀차별과 신분 차별을 철폐하며 사회를 앞서나가면서 선구적인 역할을 감당하였고 이것이 3·1 운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교회는 3·1 운동 당시의 교회와는 사뭇 달라 보인다. 사회에서의 공신력을 잃어버리고 기득권 층으로 오히려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3·1 운동 당시 신흥 종교였던 한국교회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구습을 타파하며 새로운 질서를 세워나갔지만, 오늘날의 제도화된 개신교는 기존의 정치 및 사회 체제와 타협하고 그것에 순응하는 종교 단체로 전락하고 있다. 창조적 소수에서 지배적 다수로 바뀌고 있다. 이러한 교회 모습에 실망해 교회를 떠나는 이른바 가나안 성도들이 넘쳐나고 있다.
 
이제 교회는 초기의 순수한 신앙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어떠한 기득권이나 이해관계를 넘어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고 쉽게 타협하지 않는 도전 정신으로 재무장해야 한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주저하지 않고 희생적 소수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현실의 형편을 핑계 삼아 교회 본연의 모습을 훼손하는 일을 멈춰야 한다. 모든 세속의 가치를 넘어 하나님나라를 소망하는 숭고한 가치에 헌신해야 한다. 이것이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참된 의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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