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나라를 되찾기 위한 민중의 목소리가 전국에 울려 퍼졌다. 경기 화성 지역도 만세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난 지역으로 꼽힌다. 일본 군의 무차별적인 민간인 학살이 자행된 곳이기도 한 화성 지역.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가슴 아픈 역사가 남아있는 화성에 다녀왔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으로 꼽히는 경기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학살 현장'에 다녀왔다.ⓒ데일리굿뉴스

화성 지역 3.1운동…"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
 
'목 놓아 외쳤던 3.1운동의 흔적'과 온전히 사과 받지 못한 '학살 사건'의 아픈 역사가 남아있는 경기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학살 현장은 1982년 사적 299호로 지정됐다.
 
1919년 화성 지역의 3.1운동이 거세지자, 일본은 군대를 동원해 마을을 돌아다니며 무차별적으로 방화, 폭력, 살상, 고문 등을 자행하며, 주민들을 진압했다.
 
이 가운데 1919년 4월 15일 화성 제암교회에서 일어난 '제암리 학살사건'은 일제가 가장 잔인하게 민간인을 탄압했던 사건으로 꼽힌다.
 
사건을 세계에 알린 캐나다 스코필드 선교사에 따르면, 당시 일본 군은 성인 남성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에게 전달할 말이 있으니 모두 제암교회에 모이라고 명령했다.
 
이후, 명령에 따라 바닥에 앉은 23명 가량의 사람들을 향해 문을 잠그고 주민들에게 무차별적인 총격을 가했다. 대부분이 죽거나 다쳤는데도 군인들은 불에 잘 타는 초가지붕과 목조 건물, 제암교회에 불을 질렀다는 것이 사건의 전말이다.
 
23명의 무고한 희생자들은 사건이 발생한지 수십 년이 지난 1982년, 제암교회 뒤 편 합동 순국묘에 안장됐고, 불에 탄 제암교회 터엔 3.1운동 순국 기념탑이 세워졌다. 제암교회는 현재 그 옆 부지에 예배당을 세우고 예배를 드리고 있다.
 
제암교회 강신범 목사는 "100년 전 선조들이 어쩌면 그렇게 용감하셨을까 싶다"며 "매 맞고 옥에 갇히고 죽임 당할 것 뻔히 알면서도, 나는 희생된다 할지라도 후손들에게만은 이 아픔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일사각오로 나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무고한 제암리 선조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기독 선배들의 애국심과 독립 정신을 본받고, 후손들에게도 모범이 되는 교회가 되겠다"고 덧붙였다.
 
한편, 일제의 학살은 제암리 뿐만 아니라 고주리, 수촌리 등 화성 전역에서 자행됐다.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수촌교회도 일본군의 만행에 전소됐다가 1922년 아펜젤러 선교사의 도움으로 복원됐다.
 
하지만, 학살사건을 주도한 아리타 도시오 중위는 군사재판에 회부됐음에도 결국 무죄를 선고 받았다. 학살에 대한 처벌규정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이 일본 측이 주장하는 무죄선고 사유다.
 
강신범 목사에 따르면, 현재 제암리에는 70가구 3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3.1운동 희생자 직계 유가족은 6가구다.
 
일본정부는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공식적인 사과를 피하고 있어 선조들과 후손들의 상처와 눈물이 아직까지 씻겨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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