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해다. 이에 본지는 종파를 초월한 연합운동으로 민족 독립의 불을 지폈던 3·1운동의 의미를 조명하고, 이를 통해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짚어본다. 편집자 주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하늘을 누비고 교육에 힘썼던 기독인 여성들. 이들은 험난한 독립의 길을 걸으며 자신의 모든 생을 바쳤다. '독립'이라는 이길 것 같지 않은 싸움에 수많은 사람이 포기하고 변절의 길로 돌아섰지만 묵묵히 나라 사랑의 길을 걸어간 여성들의 삶을 통해 3·1절의 참된 의미를 되새겨 본다.
 
 ▲귀국후 원산 마르다윌슨 신학교 재직 시절이 김마리아. 왼쪽 첫 번째 (사진=국가기록원)

 
대한의 잔 다르크, 김마리아(1892~1944)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은 "한 민족이 그들 국가의 독립 문제를 스스로 결정짓게 하자"는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선언한다. 그해 11월 11일 종전이 선언되고 전쟁 이후 세계질서를 정하기 위한 파리강화회의가 이듬해 1월부터 열릴 것이라는 소식이 알려진다.
 ▲영문 이니셜이 새겨진 미국 유학시절 김마리아의 사진 (사진=국가기록원)

'조선 독립의 기회가 찾아왔구나' 김마리아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김마리아를 비롯한 재일 유학생들은 독립선언을 위한 준비에 돌입해 2월 8일 도쿄 한복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를 벌였다. 많은 학생이 잡혀가고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는다.

2·8독립선언의 중심에 있던 김마리아는 일본 경찰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기모노를 입고 현해탄을 건넌다. 그의 품속에는 2·8독립선언문 10여 장이 감춰져 있었다.

부산에 도착한 그는 전국을 돌며 동포들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촉구했다. 특별히 여성의 역할과 참여를 독려했다. 3월 1일의 거국적인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져가던 3월 5일 김마리아는 남대문 앞에서 격렬한 만세 시위를 이끌었다.

이 일을 계기로 검거된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온갖 고초를 겪게 된다. 출소 후 김마리아는 모교인 정신여학교에서 대한애국부인회를 결성한다. 그는 대한애국부인회 취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부인도 국민 중의 한 사람이다. 국권과 인권을 회복할 목표를 향해 전진하고 후퇴할 수 없다."
 
대한애국부인회에 수많은 사람과 자금이 모였다. 회원은 2,000여 명을 헤아렸고 6,000원의 성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하지만 밀정의 고발로 애국부인회의 활동이 좌초되고 김마리아는 또다시 고초를 겪게 된다.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생사를 헤매던 그는 보석으로 풀려나게 되고 임시정부의 도움으로 상해로 탈출한다. 몸이 완전히 망가진 상태에서도 김구 선생과 함께 임시정부 대의원으로 활동하며 항일 독립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상해 활동을 마무리하고 1923년 미국으로 건너간 김마리아는 파크대학, 시카고대학, 컬럼비아대학 등에서 사회학과 신학을 공부하며 민족지도자가 되기 위한 실력을 쌓기에 매진했다. 그 와중에도 유학 중인 여학생들을 결집해 '근화회'를 조직하는 등 재외 독립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이런 그녀를 두고 도산 안창호 선생은 "김마리아 같은 여성 열 명만 있었다면 한국은 독립을 이뤘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1933년 10여 년 만에 학업을 마친 김마리아는 조국으로 향했다. 원산에 도착한 그는 마르다윌슨 신학교에 부임해 신학을 가르치며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모진 고문과 오랜 해외 생활로 몸이 상한 김마리아는 광복을 1년 앞둔 1944년 "대동강 물에 뿌려 달라"는 말을 남기고 순국했다.
 
 ▲대한애국부인회 동지들과 함께한 권기옥(오른쪽에서 두 번째)지사의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 권기옥(1901~1988)

1917년 서울 여의도 상공에서는 미국인 아트 스미스 커티스가 곡예비행을 펼쳤다. 구경에 나선 경성 사람들은 육중한 비행기가 신묘한 연기를 펼치며 이리저리 나는 모습에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그때 열여섯 소녀 권기옥은 민족을 위한 꿈을 갖게 된다. '나는 비행기 타는 공부를 하여 폭탄을 안고 일본으로 날아가리라!'
 ▲1935년 중국 선전비행을 앞둔 무렵의 권기옥 (사진=국가기록원)


이후 그는 평양 숭의여학교에 다니며 '조종사'와 '독립'이라는 꿈을 키워갔다. 그는 숭의여학교 교사였던 박현숙 선생의 권유로 비밀결사대 '송죽회'에 가입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항일 독립운동의 길을 걷게 된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신흥식 목사의 지휘 아래 일본인 사감의 눈을 피해 기숙사 안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애국가 가사를 찍어내는 등 만세운동 준비에 힘을 보탰다. 그는 3월 1일 평양 숭덕학교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의 대열에 앞장서 나섰다가 평양경찰서에서 3주의 구류처분을 받고 구금됐다.

출소 후 임시정부 산하 청년단원이었던 문일민, 장덕진으로부터 평남도경(오늘날 도청) 폭파를 도와달라는 전갈을 받았다. 이들과 함께 폭탄을 제조하고 운반하는 일을 돕다가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엔진도 없는 멸치잡이 배를 타고 상해로 탈출했다.

상해에 도착한 권기옥은 임시정부 손정도 의장의 집에 머물며 학업을 이어갔다. 1923년에는 독립전쟁을 위한 군관 양성을 추진했던 임시정부의 추천을 받아 운남육군항공학교 1기생으로 입학하게 됐다.

당시 중국에는 군벌들이 세운 네 곳의 비행학교가 있었다. 그중 두 곳은 권기옥이 여자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했고 ‘쑨원’이 세운 광동항공학교에는 비행기가 남아있지 않았다. 남은 학교는 중국 서남단 후미진 곳에 있는 운남육군항공학교뿐이었다.

그는 임시정부 이시영 선생이 써준 추천서를 가지고 중국을 가로질러 운남성으로 향했다. 가는 데만 꼬박 한 달의 시간이 걸렸다. 추천서를 들고 교장인 ‘당계요’와 담판을 벌이는데 당계요는 여성의 몸으로 비행사가 되기 위해 찾아온 조선 여성의 용기에 입학을 허가했다. 그녀의 나이 스물셋, 1917년 서울 하늘에서 비행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지 꼭 6년 만의 일이었다.
 
 ▲1935년 중국 선전비행을 준비하던 무렵의 권기옥(왼쪽에서 두 번째), 가운데 이탈리아 교관, 중국 최초의 여자 비행사 이월화와 함께 (사진=국가기록원)


혹독한 비행훈련과 ‘여류 조종사’가 있다는 소문이 퍼져 일제의 암살시도가 이어지는 등 위기 가운데서도 1925년 비행학교를 졸업하여 최초의 한국인 비행사가 됐다.

상해로 돌아간 그녀는 임시정부의 비행기를 타고 조선총독부를 폭파하기 원했지만 여의치 않자 중국 공군에 들어가 10년간 활약했다.  이때의 활약을 눈여겨본 중국 국민당 총통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은 그에게 중국 청년들 독려하기 위한 선전비행을 제안한다. 선전비행은 상해에서 북경, 동남아시아를 거쳐 일본까지 날아가는 경로였다.

권기옥은 선전비행의 마지막 순간 기수를 돌려 일왕의 궁을 폭격할 뜻을 굳힌다. 하지만 중국 국내 정국이 불안해져 선전비행이 무산되자 일본출격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해방 이후에는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공군 창설에 힘을 보탰다.

조국이 사라져버린 황량한 땅에서 조국독립을 위해 불굴의 삶을 살아낸 김마리아와 권기옥. 이들의 활약은 이 땅의 여성들이 누군가의 어머니, 누나가 아닌 조국독립의 당당한 주역이었음을 보여준다. 용기와 기개로 자신들의 이름을 민족사에 아로새긴 두 여성의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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