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원 ⓒ데일리굿뉴스
1937년 9월 9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북쪽 라즈돌리노예 역.
 
“이주 열차는 가축을 운반하던 화물칸을 개조해 만든 터라 고약한 냄새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승객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차라리 가축이라고 이야기 하는 게 더 옳을지 몰랐다. 그렇게 6,600㎞를 가야했다. 추위와 굶주림, 전염병에 시달렸다.
 
홍역으로 짧은 생을 마감한 아이들이 계속 생겨났다. 관을 짤 나무는커녕 종이나 천 조각조차 없었다. 기차가 멈추면 시신을 벌판에 버릴 수밖에 없었다. 허허벌판에 구덩이를 팔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시베리아를 거쳐 한 달 만에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 도착했다. 사방이 뻥 뚫려 지평선만 보였다. 겨울바람은 겉옷을 파고들었다. 아이들을 배가 고프다고 울었다. 바람을 막을 움막조차 없었다. 이렇게 가면 며칠 못 가 다 죽을 것 같았다.
 
언덕에 땅굴을 파고 갈대로 지붕을 덮었다. ‘토굴 가옥’에서 겨울을 지냈다. 4월에 풀이 났다. 그걸 뜯어 삶아 먹었다. 척박하고 건조한 땅에 고려인들은 나뭇가지로 땅을 파 벼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슬픈 결말을 맺는 소설의 도입부 일 것 같은 고려인 강제이주 상황을 ‘알마티 고려민족중앙회’ 측의 설명을 인용해 재구성 했다.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한 고려인 17만 명 중에 홍범도 장군도 끼어 있었다. 불모의 땅에서 그는 6년을 살았다. 고려극장 수위로, 정미 공장 근로자로 일하다 조국의 광복을 2년 앞둔 1943년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동포사회는 그를 외롭게 두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궂은일을 마다 않아 동포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는 그는 크즐오르다 공원에 안장됐다. 고려인들과 옛 전우들이 성금을 모아 분묘를 손보고 철로 된 비를 세웠다니 그의 행적을 짐작할 만하다.
 
인생 3막, 드라마 같은 장군의 삶을 되짚어 보면 숙연해진다.
 
평안북도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머슴살이를 하던 장군은 나는 새 조차 찾지 않는다는 산간벽지 함경북도 갑산(甲山)에서 수렵과 광산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다 운명처럼 일본군과 마주친다.
 
총포를 회수하러 온 일본군과 대적해 그들을 전멸시키며 의병 활동에 발을 들여 놓은 게 독립군 인생 1막의 서곡이다.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에 전력하던 그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이 돼 만포진 전투에서 일본군 70여 명 사살을 지휘하는 등 국내외를 오가며 신출귀몰한 유격전으로 큰 전과를 올렸다.
 
반격에 나선 일본군이 이듬 해 6월 독립군 본거지인 봉오동을 공격하자, 700여 명의 독립군을 지휘해 사흘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군 157명을 사살했다. 봉오동 전투는 그때까지 독립군이 올린 전과 중 최대의 승전보다. 기세를 몰아 넉 달 뒤에는 청산리 전투에 참전해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함께 대승을 이끌었다.
 
인생 2막. 장군은 우리 독립 운동사에 뼈아픈 사건을 겪는다. 이른 바 자유시 참변이다.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독립군 부대들이 러시아령 스보보드니(자유시)에 모여 통합을 논의하다 주도권 다툼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소련군에게 무장해제를 당하며 독립군 수 백여 명이 사망, 실종됐던 참극이다.
 
장군은 재판위원으로 참석했지만 동료들과 함께 땅을 치며 통곡했던 것으로 전해진다(일각에서는 그가 당시 독립군을 공격했다고 주장하지만 역사학계 주류의 해석은 다르다).
 
그 후 연해주에서 집단농장을 차려 농사를 지으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다 강제 이주되며 카자흐스탄에서 한 많은 인생 3막을 맞게 된 것.
 
그리스어로 고국을 떠나 흩어진 사람을 뜻한다는 ‘디아스포라’, 해외 동포들의 참정권 문제를 다룬 ‘재외선거’를 책으로 펴낸 필자 입장에서 그들의 삶은 영원한 관심사이다. 해외 유민 하나하나가 역사소설의 소재로 써도 될 만한 이야깃거리를 안고 산다. 하물며 독립운동으로 혁혁한 공을 세운 장군의 일대기는 젊은 세대에게 훌륭한 산 교재 일 것이다.
 
광복 76년을 맞은 올해 그가 모국에서 영면할 수 있도록 유해가 봉환됐다. 우리 정부의 노력에 더해 카자흐스탄 정부와 현지의 고려인 동포 사회가 합심해 수년간 끌어온 봉환을 성사시켰단다.
 
모든 사람이 고향을 생각하는 중추가절에 홍범도 장군과 더불어 뼈아픈 역사의 한 장면을 되살린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그가 안장된 대전 국립현충원에 참배하러 가야겠다.
 

[송기원 언론인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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