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원 ⓒ데일리굿뉴스
더불어민주당 경선에서 정세균 후보가 중도하차했다. 충청·경북·강원 경선에 이어 기대했던 1차 선거인단 투표 결과마저 저조한 성적을 보이자 뜻을 접었다.
 
특히 ‘고발 사주 의혹’의 대척점에 선 추미애 후보가 선전하며 3위 권 밖으로 밀려난 게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그는 사퇴의 변을 통해 “평당원으로 돌아가 하나 되는 민주당,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해 백의종군 하겠다”고 밝혔다. 대권 후보 중 많지 않은 경제 전문가로 유능한 진보를 표방했던 정세균 후보가 정치 원로로서 앞으로도 국가 발전에 새로운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정 후보의 낙마로 전직 국무총리의 대권 도전은 또 한 번의 실패로 기록됐다. 우리 역사 상 국무총리 출신들의 대권 도전 역사를 짚어봤다. 결론부터 말하면 역대 국무총리 중 대통령을 역임한 경우는 우리 정치사에 단 한 차례 있었다. 우리나라 제 10대 대통령, 최규하 전 대통령이 주인공이다. 박정희 정권 당시 총리를 지내고 곧바로 대통령에 선출됐다.
 
당시 선거 결과를 보면 정치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1979년 10월 26일 대한민국 제9대 대통령 박정희가 피살된 후, 헌법 제48조에 따라 당시 국무총리이던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하였다. 헌법에는 대통령 궐위 시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하여 3개월 이내(1980년 1월 26일까지)에 후임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최규하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장대행은 박정희 대통령의 국장을 마무리한 이후 제10대 대통령선거를 1979년 12월 6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제10대 대통령선거는 제8대 및 9대 대통령선거와 동일한 방법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실시되었으며, 대통령후보는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 단일후보였다. 선거결과 최규하 후보는 재적대의원 2,560 중 2,549명이 투표에 참여한 가운데 2,465명의 찬성으로 제10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무효표가 84표나 되었다.’
 
최규하 대통령은 이듬해 9월 하차한다. 총리 출신 첫 대통령의 수명은 임기 10 개월이었다. 그 후 20여 년이 흘렀지만 총리 출신 대통령은 나오지 않았다. 총리 출신 대권 후보의 집념의 도전사는 누가 뭐래도 이회창 전 총리가 썼다.
 
그는 김영삼 정부에서 총리를 역임했지만 대통령과 수시로 마찰을 빚다 자진 사퇴하고 대권에 도전했다. “법적 권한도 행사하지 못하는 허수아비 총리는 안 한다”라는 사퇴의 변으로 그는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대쪽 총리 출신의 유력한 대선주자는 하지만 ‘아들의 병역 면제 의혹’이 불거지면서 김대중 후보에게 역대 대통령 선거 사상 두 번째 근소한 표차인 1.6 %p차로 패배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 씨는 최근 페이스북을 통해 “당시 이회창은 자신의 지지율만 믿고 마치 정권을 잡은 양 김영삼 당시 대통령을 무시했고 강력한 경쟁자였던 이인제를 내쳤고 우군이 될 JP(김종필 전 국무총리)를 나 몰라라 해 통한의 역전패를 당했다”고 말한 것으로 중앙일보는 보도하기도 했다.
 
이회창 전 총리는 절치부심하며 4년 뒤 다시 도전했지만 노무현 정몽준 두 후보의 단일화 벽에 밀려 낙선했다. 4년 뒤 세 번째 도전인 17대 대선에는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역시 대권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김영삼 정부와 노무현 정부 시절, 두 차례 총리로 기용된 ‘행정의 달인’ 고건 전 총리는 대권 도전 의사를 보였다가 불출마 선언으로 꿈을 접었다. 출마 선언을 하지도 않았는데 한때 지지율 1위를 달리기도 했던 그였다. 고건 전 총리는 회고록에서 2007년 자신의 대선 불출마 선언에 대해 “정치적 실패를 놓고 보면 중도실용의 정치가 설 자리도 좁았지만 비정당 출신 제3의 정치인이 설 자리가 더 좁았다. 참여정부의 총리를 해서 진보 쪽으로 포지셔닝이 된 상황에서 2006년 북한의 1차 핵실험이 발생하니 역부족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또 “북한 핵실험으로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었고 열린우리당이 아무리 간판을 바꿔도 떨어지는 건 확실했다. 다음 대선에 재수로 후보가 돼야 하는데 나이가 DJ가 대통령이 됐던 만 73세 보다 많아지는 거다. 노욕을 덮어 버릴 만큼 권력의지가 강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총리는 아니지만 UN 사무총장을 역임해 대통령과 국무총리 사이 수준의 예우를 받은 반기문 전 총장 역시 총리급 대권 도전자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대통령 탄핵으로 2017년 5월 치러진 19대 대선을 6개월 앞둔 여론조사에서도 반기문 전 총장은 여전히 당시 문재인, 안철수 후보를 앞선 1위였다. 하지만 연말부터 지지율 하락세로 반전하자 반 전 총장은 이듬 해 2월 대선전에서 물러났다. 정치 교체와 국가 통합을 이루겠다며 출마한 반 전 총장은 인격 살해에 가까운 모해 등으로 정치 교체의 명분은 실종됐다며 불출마를 선언했다.
 
‘1인지하 만인지상’으로 불리는 총리는 대통령이 되기 그렇게 어려운 걸까? 국무총리라는 자리는 정권의 2인자인 만큼 정책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대통령의 공과를 그대로 떠안고 가는 숙명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고 자신이 몸담았던 정부를 비판하는 것 또한 우리 국민 정서상 크게 환영 받지 못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총리가 대권주자로 나설 경우 두 가지 중 어느 쪽에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고건 전 총리의 표현처럼 포지셔닝이 가능할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부동산 정책 실패를 인정했지만 임기 말 대통령으로선 크게 나쁘지 않은 40% 대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
 
정세균 후보의 사퇴로 이번 대선에선 총리 출신 후보는 이낙연 후보만이 남아 있다. 그는 문재인 정부와 함께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낙연 후보는 이재명 후보에 이어 더불어민주당 경선 2위를 달리고 있다.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광주에서 정치 1번지 종로의 ‘국회의원직 사퇴’라는 배수의 진을 치고 호남 경선에서 대반전을 벼르고 있다.
 
추석 연휴 직후에 있을 호남 경선에서 돌파구를 찾지 못하면 이재명 후보의 대세론에 제동을 걸 방법이 많지 않아 보인다. 이낙연 후보가 민주당 경선에서 반전을 이루고 내년 3월 대선에서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송기원 언론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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