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자주독립을 이룬데에는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희생이 있었다. 당시 기독교인들도 독립운동에 적극 앞장섰다. 광복 65주년을 맞아 민족대표 33인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굳건한 신앙으로 민족구원을 위해 헌신했던 신석구 목사의 생애를 살펴봤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독립운동에 힘썼던 은재 신석구 목사▲ⓒ데일리굿뉴스

민족 독립 위해 '밀알'이 된 신석구 목사

"하나의 밀알이 떨어져 죽으면 열매가 많이 맺힐 터이니 내가 독립을 위해 죽으면 내 동포 마음 속에 민족정신을 심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나라와 민족을 살릴 수 있다고 믿었던 신석구 목사. 신 목사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서울과 춘천, 개성, 원산, 남포 등지에서 전도와 목회활동에 힘썼다.
 
1875년 5월 3일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신석구 목사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방황하다 고향친구의 전도로 33살(1907년)에 기독교인이 된다.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회자가 된 신 목사는 서울 수표교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1919년, 민족대표 독립선언 서명에 마지막 주자로 참여했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오화영 목사의 제안을 받은 게 계기였다.

신 목사는 이 제안을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았다. '목사가 신조가 다른 이들과 정치 참여를 해도 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매일 새벽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 응답을 구했다.

그는 "나라를 네 대에 와서 빼앗긴 것도 큰 죄인데, 찾을 기회가 왔을 때 함께하지 않으면 더 큰 죄가 아닌가"란 내면의 음성에 귀 기울여 신앙적 결단을 내렸다. 나라를 위해 썩어지는 밀알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독립에 뛰어든 것이다.

일제는 재판정에서도 조선독립에 대한 소신을 굽히지 않던 신 목사에게 2년 6개월의 징역을 선고했다. 민족대표 33인에 가장 늦게 합류했음에도 중형을 선고한 셈이다.

수표교교회 김진홍 담임목사는 "신석구 목사는 일본 검사가 물을 때마다 '내가 감옥에서 나간 뒤에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독립운동 하겠습니다'란 얘기를 일본 순사 또는 일본 재판정에서 흔들림 없이 얘기했던 분"이라며 "확고한 신앙과 양심으로 독립 의지를 표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신 목사는 투철한 민족정신으로 설교를 할 때도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1930~40년대 일제의 신사참배와 태평양전쟁 전승기원예배 요구에도 타협하지 않아 수 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런 탓에 신 목사는 어디를 가든지 일제의 감시와 통제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충북 청주 3.1공원에 세워져 있는 신석구 목사 동상▲ⓒ데일리굿뉴스

양을 돌보는 '신실한 목자'의 삶 실천

신석구 목사는 독립활동으로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받는 와중에도 '민족구원'의 사명을 놓지 않았다. 외진 시골마을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고, 민족정신을 고취하는데 힘썼다.

특히 그는 1930년부터 5년 동안 1년에 한 번 이사를 다닐 정도로 목회 파송지가 자주 바뀌었음에도 불평하기 보다는 사랑이 없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성도들을 돌보았다. 또한 감화 있는 명 설교가로 알려져 장로교인 서울 승동교회,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현 서울기독교청년회) 등 교파를 넘어 설교를 전했다.
 
광복 후 북한에서 교회재건과 반공운동을 펼치던 신석구 목사는 신변이 위험하니 월남하라는 주변의 권유에도 "양들을 버리고 갈 수 없다"며 사역을 지속했다.

감리교신학대학교 이덕주 교수는 "기독교를 '미제국주의의 앞잡이'로 매도해 탄압하는 공산주의 정권이 세워진 북한에서 기독교 목사로 남아 있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모험이자 도전이었다"며 "신석구 목사는 공산당 측의 회유마저 거부하고 곧은 신앙의 지조를 지켰다"고 전했다.

신 목사는 1946년 평양중앙방송의 3.1절 기념 방송에 출연해 공산당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난했고, 1947년에는 반공 노선의 기독교민주당 결성에도 참여하는 등 반공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다 1949년, 신 목사는 반동비밀결사에 가담했단 혐의로 북한 공산당으로부터 10년 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 1950년 6.25전쟁 때 공산군의 총살로 순교했다.

한국정부는 신 목사의 애국정신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으며 1968년에는 신 목사의 유품(안경과 유묵)을 서울국립현충원에 안장했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김승태 소장은 "신석구 목사의 공생애는 한 마디로 우리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희생의 삶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언행이 일치하는 신앙뿐만 아니라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이 있어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빨간 네모칸 표시가 신석구 목사 이름(사진제공=국가보훈처)
 
 ▲한국정부가 수여한 건국훈장 대통령장(사진제공=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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