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굿뉴스] 김신규 기자= “초기 고신 혹은 고려신학교를 이념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인도하는 이는 박윤선·한부선·한상동 세 사람이었다. 이 세 사람의 헌신이 오늘의 고신의 정신적 기초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한부선(韓富善, Bruce F. Hunt, 1903-1992)은 고신교회(敎團)와 고려신학교에서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이상규 교수 ⓒ데일리굿뉴스
     ▲이상규 교수 ⓒ데일리굿뉴스

한국개혁주의연구소(소장 오덕교 박사)가 3월 22일 서울 강남 유나이티드문화재단 지하 1층 더블라스홀에서 마련한 ‘초기 내한 선교사 탐구시리즈5 헌트가와 한국교회’라는 심포지엄에서 발제자 이상규 교수(고신대 명예, 백석대 석좌)는 이같이 밝혔다.

‘해방 이후 한부선 선교사와 고신, 고려신학교’라는 주제로 발제한 이 교수는 한부선 선교사에 대해 한위렴(韓衛廉, William B. Hunt, 1869-1953) 선교사의 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나 해방 후 한국교회 특히 초기 고려신학교와 고신과 합동 교단에서 큰 족적을 남겼음을 강조했다.

한부선은 아버지 한위렴에 이어 2대 선교사로 청주(1928-1935), 만주(1936-1941)에서 사역했으며, 해방 후에는 부산지방(1946-1976)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가 한국에서 일한 기간은 약 50년에 달한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한부선은 고신교회만 협력한 것이 아닌 고신교회(1946-1976)와 합동측 총회(1961-1976)을 후원했으며, 1960년 고신측과 승동측의 연합을 위해 배후에서 노력했다. 고신이 1963년 합동에서 재분열해 구(舊) 고신으로 환원했으나 한부선은 고신과 합동, 양 교단과 선교협력관계를 유지했다.

한국으로의 파송과 신사참배 반대 운동

 ▲한부선 선교사 ⓒ데일리굿뉴스
 ▲한부선 선교사 ⓒ데일리굿뉴스

한위렴 선교사의 아들로 평양에 있는 평양외국인학교에서 고등학교 1학년 과정까지 이수했던 한부선은 1919년 미국으로 가서 휘튼대학과 라트거스(Rutgers)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24년 가을 프린스톤신학교에 입학했다. 

1928년 프린스톤 신학교를 졸업(BD)한 한부선은 그해 4월 25일 미국 북장로교회의 뉴 부른스윅 노회에서 안수를 받았고, 동시에 한국선교사로 임명되면서 아버지에 이어 제2대 선교사로 사역하게 됐다. 

그해 9월 25세의 나이로 내한한 한부선은 청주지부에 배속돼 사역을 시작했다. 이후 1935년 첫 안식년 기간을 지나면서 1936년 미국북장로교회를 탈퇴하고 정통장로교 (초창기 미국장로교로 불림)의 창립 회원으로 참여했다.

안식년을 마친 한부선은 1936년 7월 독립선교부의 한국선교사로 임명받고 1936년 만주지방 선교사로 내한해 하얼빈을 중심으로 사역하게 된다. 

이상규 교수는 “한부선 선교사가 만주에서 사역한 1936년 이후는 한부선 개인에게만 아니라 한국교회사에서도 중요한 시기였다. 이 기간은 일제에 의해 신사참배가 강요되던 시기였고 한부선은 만주지방에서의 신사불참배운동을 주도했다”고 밝혔다.

일제를 향한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강력하게 펼치던 한부선은 1942년 6월 일제에 의해 추방형식으로 미국으로 돌아갔으나, 한국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았다. 

고려신학교 교수 사역 시절

해방 후인 1946년 9월 26일 시애틀에서 일본을 거쳐 10월 28일 부산으로 입국한 한부선이 내한할 당시에는 고려신학교가 설립된 지 불과 40여 일이 지난 때였다. 이때부터 한부선은 고신, 고려신학교과 궤적을 함께 하는 이념적 연쇄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부산을 거점으로 한 한부선의 선교활동은 고신, 그리고 고려신학교와 관련된(이후 합동측과도 협력) 것이었다. 

고려신학교 교수로 활동하던 당시 한부선은 당시 교수로 사역하던 박윤선에 대해 고려신학교의 “진정한 단 한 사람의 교수”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상규 교수는 “고려신학교 입장에서 한부선의 동참은 미비된 고려신학교 교수단을 보완해주는 의미 있는 격려였다”고 평가했다.

이후 한부선은 1976년 5월 한국에서 은퇴할 때까지 고려신학교, 고려신학대학의 교수직로 사역했다. 특히 초대 교수로만이 아니라 부교장으로 혹은 교수회장으로 봉사하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활동을 통해 그는 고려신학교에 개혁신앙 혹은 개혁주의적 기초, 혹은 개혁주의 신학을 확산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교수사역은 무보수로 이뤄졌다. 고려신학교 설립 초기 경상비도 마련할 수 없는 열악한 학교 재정 상태를 잘 아는 한부선은 ‘무보수’ 봉사는 물론, 도리어 자신의 선교비에서 학교를 지원하거나, 강의나 설교로 받은 사례금마저도 학교에 기부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또한 1956년 고신총회 설립 후 첫 해외선교사를 파송하면서 첫 선교지로 대만을 결정한 것도 한부선 선교사의 자문과 조언에 의해서였다.

이후 고신 제7회 총회 회기 중이던 1957년 9월 20일 오후 7시경 부산 남교회당에서 최초의 대만 선교사 김영진 목사의 파송식이 거행됐고 김 선교사는 1958년 5월 13일 1만톤 급 미국 상선 존 비 워터맨호(John B. Waterman)로 부산을 떠나 선교지 대만으로 향했다. 그는 해방 이후 김순일 선교사 이후 한국의 교단총회가 파송하는 첫 선교사였다.

해방 이후 미 군정 당시인 1948년 재헌국회의원 선거일이 1948년 5월 9일 주일에 시행될 것으로 공표되면서 한부선은 미 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과의 면담과  주일 선거를 피해줄 것을 요청했다.

또한 미군정텅 장관을 역임한 윌리엄 F. 딘 장군에게 주일선거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편지를 써 선거날짜 변경을 주장해 마침내 선거일을 5월 9일 주일에서 월요일인 5월 10일로 변경됐다.

합동-고신 교단통합과 환원에 대한 견해

특히 한부선은 1960년 12월 13일 고신이 1959년 WCC 참여문제로 연동측(현 예장 통합)과 분리된 승동측(현 예장 합동)과 통합을 시도해 한 교단이 됐다. 

당시 한부선 양 교단 통합에 대해 합동을 원칙적으로 환영하면서도 합동추진의 불법성(노회수의를 거치지 않는 점을 지적)과 조급한 추진에 우려를 표명했다.

그러나 한부선의 우려대로 양 교단 합동 이후 신학교의 단일화 문제에 따른 합동-고신 양측의 갈등이 첨예화되면서 47회 총회 후 한 달이 채 되지 않는 1962년 10월 17일 한상동 목사는 어떤 공식적인 합의나 논의 없이 고려신학교의 복교(復校)를 선언했다.

이와 관련 한부선 선교사는 고신 교회가 승동측과의 신학과 신앙고백의 일치를 확인하고 합동한 일은 정죄 받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동일한 개혁신앙을 견지한 고신과 승동측의 합동을 원칙적으로 찬성하면서 동시에 교단 합동 추진 과정에서 장로교 정치원리에 준한 적법한 절차를 따르지 않는 점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즉 조급한 합동추진에 우려를 표명한 것이다. 이 교수는 한부선의 이 지적은  그 이후의 혼란과 대립을 생각해 본다면 합당한 지적이라고 평했다. 

한부선과 그가 속한 미 정통장로교 선교사들의 시각은 합동측이 합동 원칙을 파괴했다면, 고신측도 동일하게 합동원칙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부선은 고신측의 환원의 명분이 없다고 봤으며, 다른 정통장로교 선교사들과 함께 환원에 동참하지 않고 합동에 그대로 남았다. 이것은 고신의 환원이 정당하지 않았다는 인식의 반영이었다.

그러나 한부선은 환원 이후에도 고신교단과 고려신학교를 위해 동일하게 봉사했다. 이런 한부선의 행보에 대해 이 교수는 “한부선은 고신도 합동과 동일하게 개혁신앙을 추구하고 있었던 외 외에도 함께 갇힌자 됐던 ‘옛 우정’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일제에 의해 추방됐던 한부선은 1946년 10월 다시 내한해 한국동란으로 1950년에서 1952년까지는 잠시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1952년 다시 내한한 이래로 1976년 은퇴할 때까지 50여 년간 선교사로 봉사했다. 고려신학교에서 일한 기간은 30년이었다. 

1957년 안식년으로 본국에 돌아갔을 때는 정통장로교회의 총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는 1973년 6월 은퇴해야 했으나 한국에서의 그의 사역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한국에서 2년 더 일하도록 투표로 결정해 준 일도 있었다. 한국에서 50여 년의 사역을 마친 한부선은 1976년 5월 한국에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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